영천, 임진왜란, 정유재란 공신 전삼달 장군 재조명
- 문무 겸비한 지덕장 나라위해 구국의 충정 바쳐-
김병화 기자 / kbh1199@hanmail.net입력 : 2013년 09월 27일
| | | ⓒ CBN 뉴스 | | 영고정 전삼달 장군은 고려 충숙왕 원년 1315년 문과급제, 원나라에 파견 집현전 태학사, 병부상서를 지내면서 공민왕 1354년 까지 고려와 원나라를 넘나들며 조공삭감 외교를 38년간 펼쳐 나라를 소생시키고 피폐한 국민을 보호한 역사적 인물 竺山(龍宮 舊號)府院君 菊坡 全元發 선생의 9대손이다
1570년 영천 호당리(이후 녹전동 이주)에서 태어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인 가운데 먼저 떨쳐 일어나 오형제중 사형제(伯兄 全三樂 예조좌랑, 仲兄 全三益 봉화현감, 弟 西岡 全三省, 弟 訓練院 僉正 全三得)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산군 권응수 장군등과 1592년 6월 9일 문천회맹(경주복성전투)동년 6월 30일 형산강전투, 동년 7월 25일 영천복성전투, 동년 8월 22일 영천사천 전투, 1593년 10월 29일 구강동고록(울산 태화강· 대양 전투), 동년 11월 3일 안강전투, 1596년 3월 3일 팔공산회맹(팔공산 전투), 정유재란에 방어사 곽재우 장군이 지휘하는 1597년 7월 7일 화왕산 회맹(창녕, 화왕산 전투)에 참가 하여 여러 고을 의사들과 수성에 공을 세웠다
宿安康縣吟飮詩 (隆慶壬辰十月安康戰陣中)
안강현에 자며 시를 읊다. 〔융경 임진(1592)시월 안강전 진중에서〕
『雲山千里聖何知
천리 구름산은 임금께서 어찌 아시겠는가
北望胸懷獨夜遲
임금 그리는 회포(북망) 가슴에 담으니 홀로 밤이 기네
餉士東爲成一誓
동방을 위해 군사 먹이고 나라 위해 맹서하니
生輕義重死前期
생은 가볍고 의리는 무거워 죽음을 기약하네』
이글은 영고정 전삼달 장군이 임진년 시월 안강 진중에서 쓴것이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들과 대치한 23살의 젊은 의병장이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겠다는 뜨거운 충정을 표현한글로서 이순신 장군이 임란을 맞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앉아 나라를 걱정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장군이 형제들과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써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노력 공로와 二子(둘째 아들) 諱 全乃性, 訓練院 主簿도 제2차 조 ․ 청 전쟁(병자호란, 1636년)삭녕(경기 연천)전투에서 戰死 하는 등 장군의 충효정신은 후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역사적 그늘에 가려져 있다
〔三子(셋째아들) 全安性, 어모장군 天城堡萬戶, 장군의 손자이자 全安性의 一子(첫째아들)全爾墩, 선략장군 安興堡萬戶 歷任)
정유재란을 합한 7년의 전쟁이 끝나고 차츰 정국이 안정되어가는 그 이듬해인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이듬해 북쪽 변방지역에 오랑캐가 나타나 노략질을 자행하므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북방 경비책 으로 심양(瀋陽)에 급파되어 이를 쳐부수며 큰 전과를 올렸다 1605년 선무 원종공 3등에 錄勳되고 (伯兄 全三樂 예조좌랑 2등 녹훈 , 仲兄 全三益 봉화현감 3등 녹훈, 弟 西岡 全三省 貢을 사양, 낙향)
부산진에 주재 할 때는 섬 오랑캐들이 교화되었으며 제1차 조 ․ 청 전쟁 (정묘호란,1627년)후 朝廷에서는 청의 위협이 걱정되어 慶尙左道水軍節度使
〔1627년 2월 29일 경상 좌수사로서 병사(兵士)를 뽑아 군량을 운송하는 일 때문에 왜인을 응접하는 물건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狀啓〕
로 있는 공을 黃海道兵馬節度使 兼 黃州牧使로 발탁 1628년 8월 16일 인조대왕이 친히 인견하여 황주가 안주다음 국가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강조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황해 병사로 재임시 나쁜일에 엄격하고 주변사람들을 편하게 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는 욕심이 없이 깨끗하였고 공적으로 누를 끼친 일이 없이 청백하고 근검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사졸들에게 미쳤으며 겹 비단 옷을 입지 않았고 창고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朝鮮王祖實錄, 墓地銘(이장당시 墓에서 발견된 誌石, 晋州牧使 鄭好仁
謹誌) 參照〕
숭정원년 7월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영목사 부임시 충정을 표현하는 詩한수가 역시 전해져오고 있다
去黃海道兵馬節度使兼黃州領牧使赴任時 (崇禎元年七月)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 영목사를 떠나 부임 시에〔숭정 원년(1628)7월〕
『回頭北望拜 君門
머리 돌려 북쪽 바라며 대궐(임금계신)문으로 절하며
自怍平生受厚恩
평생 입은 두터운 은혜 스스로 부끄럽네
向日丹心鬚欲白
임금 향한 충성에 수염까지 희어지니
胸中大義與誰論
가슴 가운데 대의를 누구와 의논 하겠는가』
1628년 8월 16일 인조대왕은 諭守를 통해
“황해도병마절도사 전삼달에 이르노라. 경은 국방에 맡은 책임이 중하므로 병졸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히 하고 도적을 막는데 최선을 다하라. 혹 나와 독대할 일이 있으면 비밀로 하라. 만약 간모한 일이 있을지 모르니 비상시는 짐과 합의한 후에 시행하기로 하고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21명부를 보내니 경은 잘 보관하여 때가 오면 실행하여 국가에 더욱 충성하라”지금까지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御書閣(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소재)의 諭守 내용으로 볼 때 지략과 무예를 겸비한 장군을 인조 대왕이 신임 하여 오만불손한 청나라를 응징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나 불행히도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유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633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전삼달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지덕장으로 나라를 위해 구국의 충정을 바쳤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3년상을 마친 효자이기도 했다
〔將軍의 貴로 父 全夢龍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從二品), 祖父 全希相 贈 通政大夫 刑曹參議(正三品), 曾祖父 全 彦 贈 通訓大夫 通禮院 左通禮
(正三品), 3代 贈職 墓所 영천시 화산면 화산리 花村 선영 在〕
400여년이(1633년 6월 14일 別世, 12월 27일 葬禮)지난후 2004. 1. 15 후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천시 화산면 화산리 화촌 선영에 위치하던 장군의 묘소를 무학 대사의 비결에 나오는 영천 10대명당중 하나로 꼽히는 천마 시풍(天馬凘風)인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 백산으로 이장하였다
이장과정에서 관은 송진이 10센티미터 가량 두께로 둘러져 있어 장군의 시신은 미라로 남아있었고 묘지석(두께 2센티, 가로 20 센티, 세로 20 센티) 2개와 수의 1습, 버선, 멱목, 광다회(허리띠)등 15점을 國立民俗博物館에 기증하였으며
장군은 격전장에서 치룬 용맹은 물론 주도면밀한 작전계획과 사전방어계획을 훌륭하게 세웠다 가끔 왜군이나 오랑캐가 해안지방과 변방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감행하였으므로 더욱 튼튼히 국방을 길러야 했다 장군은 임지에 도착하여 즉시 병력을 증강하여 정예부대로 훈련시키고 한편 해안에 방어망을 구축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높여 추호의 틈도 없이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이렇듯 치밀한 작전을 수행하면 조정에서는 또 다른 곳으로 이임시키는 등 그만큼 능력을 인정하여 장군으로 하여금 전국의 위험지구에 방어망을 구축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태평을 누리게 되었고 장군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長短에는 선정비(善政碑)가 黃州에도 거사비(去思碑)가 각각 세워져 있다
1616년 2월 3일 창원별장 全三達 賞加書(광해군)
1628년 2월 23일 諭 경상좌도수군절도사 全三達(인조), 熟馬一匹下賜
1628년 8월 16일 諭守 황해도병마절도사 全三達(인조) 등 3회의 어서를
내렸으며
임진왜란당시 운주산과 팔공산, 영천, 경주 일대를 넘나들며 전쟁의 현장을 누빈 장군의 壬亂日記와 행적 등이 기록된 潁皐亭 實紀, 어서 3점, 교지 16점, 유물 5점이 후손들에 의해 전해져오고 있고
蘆溪(朴仁老, 조라포萬戶)文集乾과 國譯 暘溪(鄭好仁, 晋州牧使)先生文集 全에 의하면 장군을 기리는 詩가 전해져오고 있다
蘆溪集 七言絶句篇 兵馬節度使 全三達 詩 2篇 收錄
送全節度三達 赴關西二首
관서에 부임하는 전절도사 전삼달(全三達): 용궁인(龍宮人)으로 호는
영고정(穎皐亭)이며 임진란때 전공(戰功)이 많았고 관은 황해도(黃海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전삼달을 보내며 두수를 짓다
戊辰(무진)
『懷忠奮義啓師行
충성품고 의리 떨치며 행군을 하니
虜賊聞風膽己驚
소문들은 오랑캐들 간담이미 서늘 하리
英雄所向應無敵
영웅이 가는 곳엔 응당 적이 없으리니
西土塵埃一掃淸
서토(西土)의 티끌을 말끔히 쓸어 버리리』
『義氣崢嶸十丈虹
드높은 의기(義氣)열길 무지개와 같으니
高牙飄拂向秋風
날카롭게 치솟은 깃발 가을바람에 나부 끼네
令行應上麒麟閣
이번 출전으로 응당 기린각(麒麟閣): 한(漢)나라 선제(宣帝)때 세워졌으며 이곳에 나라에 공이 있는 신하의 형상을 그려서 그 공을 기렸다
竹帛茁名永不窮
역사에 이름 드리워 영원히 전해 지리』
國譯 暘溪(鄭好仁, 晋州牧使)先生文集 全
輓 全兵使 三達
전병사(全兵使)삼달(三達)을 애도하여
『符彩酋酋八尺强
건장한 의표(儀表)가 팔척이 넉넉하니
龍宮重覩吐榮光
용궁(龍宮)에 영광을 거듭 보았다(용궁은 전삼달 장군의 本鄕)
鷰額奇相方投筆
제비 같은 턱의 기이한 상(相)은 붓을 던지고
猿臂高才妙中楊
원숭이 같은 팔의 뛰어난 재주는 버들을 맞추었다
古者諸侯令節度
옛날의 제후(諸侯)요 지금의 절도사(節度使)라
前爲海鎭又闕防
앞에는 바다를 지키고 뒤에는 관문(關門)을 방어하였다
平生報國丹忠在
평생 한결같은 충정으로 나라에 보답함에
淸謹初心到死長
맑고 삼가는 첫 마음이 죽도록 변치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익양지, 교남지, 영천군지와 창의록(망우당
곽재우)화왕입성동고록, 백운재(권응수)실기, 노계(박인로)문집 등 많은
문헌에 의하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투에 참여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 도탄에 빠진 국민을 보호한 녹훈(錄勳)이 있어 이를 묻혀진 인물로 발굴 하여
최근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 제3차 핵실험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 장군의 살신성인 정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이순신 장군 등 이름난 장수만이 왜군을 무찌른 것이 아니고 영천 출신중에서도 그와 못지않은 노력이 있었으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확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심어주고 다른 주요의병장 등 임란공신과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공정사회에서 평등하게 우대 받을 수 있도록 배려와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될 것이다. 김병화 기자 |
김병화 기자 / kbh1199@hanmail.net 입력 : 2013년 0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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